2008년 07월 04일
민족교회를 보편교회로 성숙시키다._사도 바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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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사도 바울… 율법 초월 ‘만인의 기독교’ 정립
국민일보 2002.05.03
“대머리와 휜 다리에 눈썹은 서로 맞닿고 코는 매부리코에 단신의 다부진 체구를 가진 호감에 찬 사나이.그는 인간의 모습에 천사의 얼굴을 가진 자이다”
이 글은 2세기 문헌인 ‘바울과 테클라 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외모에 관한 서술이다.이 서술은 다혈질적이고 고집스러우면서도 생의 낙관적 의지로 충일해 있는 서신들에 나타나는 바울의 인간적 면모와 일치한다.
바울의 생애를 결정적으로 규정한 것은 단연 다메섹에서의 회심사건이었다.바울은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서 독실한 유대교인이었다.그는 자기 종교에 대한 회의로 인해 반성적으로 사유한 끝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다.그는 모세와 율법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던 기독교를 박해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그가 예기치 못한 다마스쿠스에서의 체험으로 인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예수를 박해하는 자에서 예수를 선포하는 자로 180도 전환하게 된다.이제까지 유대교를 향해 쏟아부었던 단순하고도 열렬한 헌신의 방향이 이제 기독교로 바뀌게 된다.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바울은 신비스러운 종교적,영적 체험에 열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체험의 열광적이고 신비스러운 측면에 휩싸이기보다는 그것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말한다.다메스쿠스에서의 극적인 회심 체험은 바울 자신에 의해 이방 사도로의 소명 체험으로 이해된다.그리고 이러한 이방 사도로서의 소명 체험은 이후 바울의 선교와 신학의 토대가 된다.그는 주로 시리아와 소아시아,유럽의 헬레니즘적 대도시에서 선교활동을 벌인다.그의 선교활동은 점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불가피하게 율법문제로 인해 유대교와 대결하게 된다.
바울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유대교내의 소종파로 머물러 있었다.메시아 신앙은 본래 유대교 안에 있던 것이고, 예수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칭 타칭 메시아로 등장했었다.예수도 그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었고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 정도는 당시 유대교에서 용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유대교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율법과 관련된 부분이었다.바울은 이방 선교 과정에서 할례와 관련하여 율법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아직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과 유대교인이 된다는 것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은 율법 문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거기에는 당연히 할례도 포함되었다.바울은 이를 거부하고 구원에서 율법의 기능을 부정한다.그리고 여기서부터 바울의 인의론(認義論)이 전개된다.
바울은 늘 구체적인 목회현장에서 출발하여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사유로 넘어간다.바울 서신들은 구체적인 목회적 돌봄의 과정에서 나왔으면서도 보편적인 신학적 사유로 넘어가는 단초들을 포함하고 있다.인의론 외에도 고린도교회 적대자들과의 논쟁은 십자가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바울은 부족종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당시 종교들 가운데서 인종과 성,계급,지식 등 모든 인간적 차별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편종교의 가능성을 열어보였다.인의론은 구원사건에서 율법의 효력을 정지시킨다.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효력정지시킨다.하나님 앞에 인간은 빈 손으로,맨 몸으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사회에서 차별을 야기시키는 모든 특권이 하느님 앞에서 무효가 된다.아마도 바울의 이 선언은 당시 대중에게 커다란 해방감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구체적으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이었지만 이념적으로 그것은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보편종교를 탄생시키는 데로 이끌었다.실로 당시 사회에서 그런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기독교는 수많은 다른 종교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초대 기독교가 대중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평등의 메시지와 실제 삶에서 가졌던 구호와 협동의 조직 때문이었고 이 메시지와 관행을 실천한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로마제국에 의해 반란범으로 지목됐던 사람의 종교를 바로 그 로마제국의 종교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죽은 후 그 꿈은 실제로 이루어졌다.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이지만 또한 바울만큼 엇갈리는 평가를 받은 사람도 없다.그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신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가 하면 급진적인 예수의 선포를 보수화한 인물로 지탄받기도 한다.그는 자주 반민중적 반여성적 인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바울은 급진적인 예수의 복음을 예수가 죽은 뒤 생겨났던 교회의 상황 속에서 꽃피우려 했던 사람이고 그러한 한계 안에서 그의 작업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바울이 예수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바울에 대한 평가는 바울이 예수와 다른 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예수의 선교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헬레니즘적 도시교회의 상황 속에서 바울이 얼마나 진지하게 예수의 해방 소식을 관철시켜냈는가를 평가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그리하여 그의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에서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박경미 (이화여대교수·기독교학과)
[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사도 바울… 율법 초월 ‘만인의 기독교’ 정립
국민일보 2002.05.03
“대머리와 휜 다리에 눈썹은 서로 맞닿고 코는 매부리코에 단신의 다부진 체구를 가진 호감에 찬 사나이.그는 인간의 모습에 천사의 얼굴을 가진 자이다”
이 글은 2세기 문헌인 ‘바울과 테클라 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외모에 관한 서술이다.이 서술은 다혈질적이고 고집스러우면서도 생의 낙관적 의지로 충일해 있는 서신들에 나타나는 바울의 인간적 면모와 일치한다.
바울의 생애를 결정적으로 규정한 것은 단연 다메섹에서의 회심사건이었다.바울은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서 독실한 유대교인이었다.그는 자기 종교에 대한 회의로 인해 반성적으로 사유한 끝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다.그는 모세와 율법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던 기독교를 박해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그가 예기치 못한 다마스쿠스에서의 체험으로 인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예수를 박해하는 자에서 예수를 선포하는 자로 180도 전환하게 된다.이제까지 유대교를 향해 쏟아부었던 단순하고도 열렬한 헌신의 방향이 이제 기독교로 바뀌게 된다.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바울은 신비스러운 종교적,영적 체험에 열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체험의 열광적이고 신비스러운 측면에 휩싸이기보다는 그것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말한다.다메스쿠스에서의 극적인 회심 체험은 바울 자신에 의해 이방 사도로의 소명 체험으로 이해된다.그리고 이러한 이방 사도로서의 소명 체험은 이후 바울의 선교와 신학의 토대가 된다.그는 주로 시리아와 소아시아,유럽의 헬레니즘적 대도시에서 선교활동을 벌인다.그의 선교활동은 점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불가피하게 율법문제로 인해 유대교와 대결하게 된다.
바울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유대교내의 소종파로 머물러 있었다.메시아 신앙은 본래 유대교 안에 있던 것이고, 예수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칭 타칭 메시아로 등장했었다.예수도 그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었고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 정도는 당시 유대교에서 용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유대교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율법과 관련된 부분이었다.바울은 이방 선교 과정에서 할례와 관련하여 율법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아직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과 유대교인이 된다는 것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은 율법 문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거기에는 당연히 할례도 포함되었다.바울은 이를 거부하고 구원에서 율법의 기능을 부정한다.그리고 여기서부터 바울의 인의론(認義論)이 전개된다.
바울은 늘 구체적인 목회현장에서 출발하여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사유로 넘어간다.바울 서신들은 구체적인 목회적 돌봄의 과정에서 나왔으면서도 보편적인 신학적 사유로 넘어가는 단초들을 포함하고 있다.인의론 외에도 고린도교회 적대자들과의 논쟁은 십자가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바울은 부족종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당시 종교들 가운데서 인종과 성,계급,지식 등 모든 인간적 차별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편종교의 가능성을 열어보였다.인의론은 구원사건에서 율법의 효력을 정지시킨다.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효력정지시킨다.하나님 앞에 인간은 빈 손으로,맨 몸으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사회에서 차별을 야기시키는 모든 특권이 하느님 앞에서 무효가 된다.아마도 바울의 이 선언은 당시 대중에게 커다란 해방감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구체적으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이었지만 이념적으로 그것은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보편종교를 탄생시키는 데로 이끌었다.실로 당시 사회에서 그런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기독교는 수많은 다른 종교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초대 기독교가 대중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평등의 메시지와 실제 삶에서 가졌던 구호와 협동의 조직 때문이었고 이 메시지와 관행을 실천한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로마제국에 의해 반란범으로 지목됐던 사람의 종교를 바로 그 로마제국의 종교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죽은 후 그 꿈은 실제로 이루어졌다.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이지만 또한 바울만큼 엇갈리는 평가를 받은 사람도 없다.그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신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가 하면 급진적인 예수의 선포를 보수화한 인물로 지탄받기도 한다.그는 자주 반민중적 반여성적 인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바울은 급진적인 예수의 복음을 예수가 죽은 뒤 생겨났던 교회의 상황 속에서 꽃피우려 했던 사람이고 그러한 한계 안에서 그의 작업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바울이 예수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바울에 대한 평가는 바울이 예수와 다른 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예수의 선교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헬레니즘적 도시교회의 상황 속에서 바울이 얼마나 진지하게 예수의 해방 소식을 관철시켜냈는가를 평가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그리하여 그의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에서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박경미 (이화여대교수·기독교학과)
# by | 2008/07/04 20:48 | 성서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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